Note 1.1

Jino PARK's arts work note

Archive for November 2009

하루한점 33 – Antonio Alberti – The Light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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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모어의 American Visionary Art Museum에서 본 안토니오 알베르티의 조각입니다. American Visionary Art Museum에서 정의한 비지오나리 아트란, 정규 예술 교육을 받지 않은 개인이 스스로 각성된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비지오나리 아트 박물관은 장애를 가진 사람, 감옥의 죄수, 부모에게 버림받아 전쟁터에 버려진 고아, 성적, 인종적 소수자, 정신적으로 각성한 사람 – 신을 만났거나, 외계인을 만난 사람등등이, 자신이 본 ‘비젼’을 나누기 위해 만든 여러가지 ‘예술적 사물들’을 모은 박물관입니다. 이 작가들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기 많기 때문에 주로 그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쉽게 다룰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재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그것을 다루는 방식도 아주 기발합니다. 인상적인 작품으로는 이쑤시개로만든 총 연장 10미터에 달하는 타이타닉호라든지, 발티모어 글라스맨으로 불리우는 거리의 예술가가 만든 깨진 거울로 만든 모자이크, 전직 이라크 파병용사 출신의 전과자가 감옥에서 회개의 마음을 담아 그린 아버지의 연필 초상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예술 창작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위의 작품은 안토니오 알베르티의 ‘생명의 빛’입니다.
아래는 작품 설명입니다.


작품사진을 보면, 작품 제작에 사용한 모든 공구를 같이 진열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품 설명서의 말미에 보면, 이 조악한 도구들로, 못을 갈고 철판을 깍아 직접 만든 송곳과 끌과 조각도 몇개로 17년간에 걸쳐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경외감이 느껴지면서 스스로 작가연하고 다닌것이 부끄러워집니다. 누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제 마음을 들킨 것아 얼굴이 붉어집니다. 작품을 더 열심히 만들어야겠습니다.

비지오나리 아트에 대해 좀 더 알고싶은 분들은 American Visionary Art Museum의 웹사이트를 방문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http://www.avam.org/
http://www.parkjin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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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7, 2009 at 10:5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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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점 32 – Mother – Red Str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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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헤이븐의 ‘엄마네’서 마신 자메이칸맥주입니다.

‘엄마’는 음식솜씨도 좋고, 마음씨도 좋은 자메이칸 할머니입니다.
킹피쉬에다 소꼬리탕에다 닭에다 바나나 구이까지 한 상을 차려주셨습니다.
맛있는 자메이카 맥주가 마시고 싶다고 하니까 길 건너 술가게까지 ‘삼촌’이 동행해주셨습니다. 인도인 남자와 멕시칸 여자와 한국인 남자와 미국인 여자와 한국인 꼬마와 인도인 여자로 구성 된 다인종 혼성 복식조의 저녁식사를 빛내준 좋은 자메이칸 맥주입니다.
맛은, 뭐랄까 되게 불량식품같은 맛입니다. 맥주 맛 보단 박카스 맛에 더 가까운데 이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 마시게 됩니다. 병도 아담한 것 같아서 금방 비우게 되지만 알고보면 다른 맥주와 동일한 사이즈입니다. 술 마시는 사람이 저와 인도인 여자밖에 없었지만, 6병 한 박스를 금새 비워버리고 한 박스 더 사다마신 훌륭한 자메이칸 맥주 되겠습니다.

Written by jinopark

November 24, 2009 at 4:2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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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점 31 – Roy Lichtenstein – Washing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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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에서 얻는 감동은 여러가지입니다.

우리는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에 반하기도 하고, 작품에 은연중에 녹아있는 작가의 사상이나 철학에 감동받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작품에 베어있는 작가의 드라마틱한 삶에 매료되기도 하고, 작가가 작품에 바쳤을 지난한 수고와 정성에 압도당하기도 합니다.
농부가 묵묵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작물을 가꾸는 것 같은 정성과 노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화면을 보면 누구라도 경탄하게 됩니다. 그림 한점을 위해 몇달을 혹은 몇년을 바치는 작가의 이런 노력은 집념을 넘어 신념이자 신앙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노동집약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은 대체로 소수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본과 기술과 매체권력 등 모든 면에서 약자인 이들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해서 요구하는 것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도 평등, 사랑, 자유등의 아주 보편적인 가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들의 예술 활동은 일반적인 작품제작의 범주를 넘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가치를 종교적 신념으로 승화시키는 행위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게되면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얼핏 보면 로이 리히덴슈타인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어떤 물리적 노력도 하지 않은듯이 보입니다. 로이가 그린 그림은, 동시대에 활약했던 엔디워홀의 전매특허인 실크스크린이미지 보다 더 대량복제가 가능한 옵셋 프린트 이미지 그 자체이거나 그런 이미지를 확대한 사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손으로 일일이 그려넣은 이미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점을 찍은 솜씨나, 선을 긋고 색을 채워넣은 붓자국들을 보면 로이가 뛰어난 화가인것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운필에 힘이 느껴집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도회적이고 기계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와는 달리 작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한 방법은 말 그대로 고전적인 방식입니다. 캔버스를 짜서 밑작업을 하고 배경칠을 한 다음 붓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 겁니다. 그것도 조악한 옵셋프린트 만화책의 한 컷을 정성들여서 한 점 한점 손으로 옮겨 그린 겁니다. 여기엔 어떤 주관적 해석도 없고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단순한 원칙과 그 원칙하에 행해진 노동의 결과물만이 있습니다.

작가는 어째서 이 한 컷의 이미지에 그토록 매료되었을까요? 무엇이 작가에게 그 작은 이미지의 망점 하나 하나를 크게 옮겨 그리게 했을까요? 이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작가는 이 이미지에서 뭘 본 걸까요? 그것이 어떤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길래 작가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이 이미지를 베꼈을까요?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의미를 찾는 것에 지쳐버린 것 아닐까요? 우리의 주변은 이런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어서, 마치 예전에 우리가 길에 핀 꽃을 보고 미소지었듯이, 이제 우리는 이런 이미지들을 보고 즐거워 하는 것 아닐까요?

Written by jinopark

November 24, 2009 at 4:2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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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점 30 – Mark Rothko – Unti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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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드코입니다. 사진만으론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그림의 본보기입니다.

실제로 보지 못하신 분들에겐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 사진과 실제 그림은 원숭이와 브레드피트만큼이나 다릅니다. (둘이 닮긴 닮았다고 생각하신 분에게 저는 더 이상할 말 없고요…)
마르크 샤갈에게 그 마술같은 파란색을 어떻게 만드냐고 누군가 물었더니 화방이름을 가르쳐 주더랍니다. 돈 주고 사다 쓰는거라면서요. 로드코도 분명히 돈 주고 사다 썼을 물감일텐데 어떻게 저리도 눈이 아릴 정도의 오렌지 색을 만들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존재감이란. 그림앞에 선 순간, 그림이 부풀어 오르는 듯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마치 산을 바라보며 뒤로 뛰어갈 때 산이 따라오는 듯한 느낌과 흡사한 것입니다. 그 큰 느낌. 그런가하면 그림 안에는 아주 작은 느낌들이 살아있습니다. 작고 고운 물감 방울 자국들이 빠르게 화면을 스친 흔적하며, 화면에 붓이 부딪히며 튀어오른 물감 자국들이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작은 흔적들이 화면의 경계를 따라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의 특별한 점은 촛점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진은 말 할 것도 없고, 어떤 그림이건 항상 촛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화면이 있고, 이미지가 있고, 대상이 있습니다. 아무리 추상화라고 해도 그림 안에는 작가의 의도가 깃들어있기 마련입니다.
빈 그림하곤 또 다릅니다. 빈 액자를 걸어놓은 작품을 본적도 있고, 점 하나 찍어 놓은 작품, 빈 화면 뿐인 전시장, 심지어 텅 빈 전시장 그 자체가 작품인 것도 봤습니다만, 그곳엔 작가의 의도가 있었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건 촛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팽창하는 것과 같은 단색의 두 평면과 그 경계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할 말을 다 지워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말로 꽉차있던 화면의 말을 하나씩 모두 지워버리고 난 다음이 제가 본 그 광경일지도 모릅니다. 화면에 남아있는 것은 애매한 경계. 그 불분명한 경계만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풍경화라면 풍경안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만 남은 풍경화입니다.
풍경에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것은 산도 대지도 아니고 그것들이 서로 분간되지 않는 저 먼 지점. 우리가 근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평이라 부르기도 하는, 아스라이 멀어서 결코 가 닿을 수 없지만 언젠가 우리가 떠나왔던 바로 그 곳이기 때문입니다.
섬세하지만 확고한 태도로 차근 차근 남은 말들을 다 지워버려가면서 로드코가 그리려는 것이 바로 그 곳이리라는 생각입니다.

Written by jinopark

November 21, 2009 at 2:2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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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점 29 – Jean Pierre Nadau – New York n’existe p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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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n’existe pas (detail)
59 x 246 Inches , india ink on canvas

장 피에르 나도의 ‘뉴욕은 없다’ 입니다.
거의 세로 1.5미터에 가로 6미터 육박하는 대형 벽화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0.5 미리정도의 펜으로 아주 정교하게 일일이 손으로 그려나갔다는 점입니다. 깨알 같은 이미지들이 모여 패턴을 이루고 그 패턴들이 모여 더 큰 이미지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 패턴들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비슷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묘사하는 것은 뉴육의 전경입니다. 다만 ‘나도’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뉴욕입니다. 이 그림 속에 뉴욕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뉴욕에 상상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경멸과 조소와 비난과 저주를 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뉴욕을 욕하는 것도 미국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에 대한 거대한 시각적 우화가 됩니다. 게다가 이 그림에 바쳤을 그의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나도’의 뉴욕에 대한 거부는 거의 종교적인 신념이라고까지 여겨집니다.
이 부정의 대서사시를 이루는 기본 개념은 패턴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건 제 식으로 말하자면 능률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자 거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패턴을 만들고, 그것에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러는 편이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무엇을 위해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우리는 보통,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러는 편이 능률적이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패턴을 만들어 행동하는 것은 확실히 편합니다. 왜 편하냐면 생각을 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터로 나가 일을 하고 점심시간에 맞춰 밥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남은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 저녁을 먹고 쉬다 잔다는 패턴에 한번 익숙해지면 우리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 패턴에서 벗어나게 되면 몸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취사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져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때 우리는 이런 상황에 맞는 다른 패턴을 취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휴가를 그렇게 원하다가도 막상 휴가철이 되면 약속이나 한듯이 대동소이한 장소에 몰려가 서로 별 다를 것이 없는 나날들을 보내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이유입니다.
패턴을 만들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래서 유용합니다. 문제는 패턴에 익숙해지면 생각하는 법을 잊게 된다는 점입니다. 나도는 이 패턴의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공격합니다.
나도는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패턴이라는 것을 직관하고 그것을 마치 그물망을 짜듯이 이어나가 큰 그림을 만듭니다. 한편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그 패턴을 매 순간 회의하고 배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이율배반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패턴과 패턴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대상을 거부하는 이미지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나도는 뉴욕을 그림으로써 뉴욕을 지워버립니다.

Written by jinopark

November 21, 2009 at 1:5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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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점 28 – Leonardo Da Vinci –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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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모어 과학박물관에서 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가노트입니다. 어지간한 필기광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필기광이었답니다. 전시 된 노트도 손바닥 만한 것에서 대학노트 정도의 크기까지 다양한 크기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빈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글씨를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린 글씨없이 반듯하게 쓴 글과 그림을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마치 모든 글과 그림들이 머릿속에 완성된 상태로 들어있고, 손은 그것을 옮겨내기만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전시는 과학발물관 답게 다빈치의 그림보다는 다빈치가 발명한 것들이나, 다빈치의 발명에 관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것들 위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탈 것들의 아이디어도 재미있지만, 제가 흥미있게 본 것은, 대량살상무기를 발명하고자 했던 다빈치의 열망이었습니다. 단 한가지도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고자 하는 다빈치나, 모나리자를 그린 다빈치가 탱크를 만들고 다연발 미사일을 만드는 다빈치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http://www.parkjino.comㅡ

Written by jinopark

November 21, 2009 at 12:5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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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점 27 – Marcel Duchamp – Tu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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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Duchamp (French, 1887–1968)
Tu m’, 1918
Oil on canvas, with bottle brush, three safety pins, and one bolt, 27 1/2 x 119 5/16 in. (69.8 x 303 cm)
Gift from the Estate of Katherine S. Dreier
1953.6.4
©2004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 Succession Marcel Duchamp
The art collector and educator Katherine Dreier commissioned Tu m’ to be hung over a bookcase in her library—hence the unusual shape of the work. Executed in 1918, it is Duchamp’s last painting on canvas and revisits highlights of his career. Ranging across the canvas from left to right are the cast shadows of a bicycle wheel, a corkscrew, and a hat rack. Providing counterpoint to these silhouettes are collaged elements and a pointing hand rendered illusionistically. The title lends a sarcastic tone to the work, for the words, perhaps short for the French tu m’emmerdes or tu m’ennuies (you bore me), seem to express his attitude toward painting as he was casting it aside.
For more information on the Société Anonyme Collection, please visit http://artgallery.yale.edu/
마르셀 뒤샹의 마지막 유화 작품이랍니다. 부끄럽지만, 전 이런 작품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꽤 이상한 위치에 걸려있었습니다. 이 작품 오른쪽 앞에는 역시 뒤샹의 작품인 ‘눈삽’이 걸려있었고, 그 뒤 벽면 위에 높이 걸려 있었던 작품이 이 작품입니다.
뒤샹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이 작품도 뭔가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의 예언이거나 혹은 비밀스런 암시처럼 여겨지는 그림입니다. 수수께끼같은 색의 스펙트럼이라든지 자전거 바퀴와 포도주 따개와 모자걸이의 그림자라든가, 지시하는 손, 켄버스를 뚫고 나온 굴뚝 청소솔과 찢긴 캔버스의 이미지, 뒤샹의 자유낙하 곡선들등등이 뒤섞여서 뭔가 묘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왠지 미완성같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사진에선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붉은 선으로 톱니바퀴등과 같은 기계장치를 그려넣은 스케치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그리던 때의 뒤샹은 자신의 전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을 만들 생각이기도 했었던 모양입니다.
작품 제목 Tu m’가 예일 미술관의 설명으론 ‘뛰 메뉘’ 혹은 ‘뛰 메메흐드’라고 합니다만, 어쩐지 저는 ‘뛰 망부아 라 – Tu m’envoit la’ 라고 읽었습니다. 문법적으로 어색하긴 하지만, ‘네가 내게 보내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애매모호한 것. 불분명한 것, 규정짓지 않는 것, 만져지지 않는 것, 설명되지 않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리 단정지어 말씀드리자면 이런 증상들은 예술적 경험을 하기 위한 과정이지 그 결과가 아닙니다. 예술적 감동은 작품과의 일치감에서 오는 것이지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뒤샹의 작품앞에서 하게 되는 것은 뒤샹의 작품이 대체로 모호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뒤샹의 작품은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고,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확실히 시각적 일치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뒤에 따라오는 이미지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질문들은 작품을 풍요롭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심력과 작품에 대한 해석을 거부하는 원심력의 긴장이 뒤샹의 작품에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는 뒤샹의 작품과, 한 발 들어서서 보는 뒤샹의 작품은 매우 다릅니다. 왜냐하면, 뒤샹은 예술적 망자이기 때문입니다.
뒤샹과 친구들은 예술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행간을 잘 읽어보면, 그 ‘죽음’ 이 자연사인지 사고사인지, 혹은, 살인인지 ‘행방불명’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또한,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예술적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유산은 그들이 물려받았습니다. 따라서, 그 ‘죽음’으로 인해 그들이 예술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된 것은 아니고, 죽은 것은 그들의 ‘예술적 아버지’이지 ‘예술’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집 나간 아버지(예술적 아버지)를 죽었다고 단정하곤, 집(예술)이 망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거죠. 이런 자포자기적 상황이 제가 생각한 햄릿과 닮았습니다.
” To be or not to be.

과연 햄릿의 고민이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저울의 무게는 죽음쪽으로 기울었던 것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에 상당하는 무게를 짊어지고 저울의 반대쪽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 그러니 그의 질문은 삶에 치러야 할 고통과 시련등의 댓가가 과연 값어치 있는 것이냐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닐까? 더욱이 그 삶이라는 것도 끝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매우 유보적인 삶이라면…
햄릿의 고민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사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지 않았을까?
이미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햄릿은 강하다. 그는 죽음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탁, 끈을 놓아버리 듯이 죽어버릴 수 있다. 누군가 지금 죽여준다면 감사 할 따름이다. 따라서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야 다른 의문도 풀린다. 유약한 햄릿에 대한 의문. 복수의 광기에 사로잡혀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한 유약한 젊은이가 이끌어가는 복수극이 그렇게도 잔혹하다는 것이 나는 항상 의아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사실은 죽음도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발 한발 적에게 다가가 목을 움켜쥐는 생사를 초월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라면 수긍이 간다.
그러니까 햄릿은 좀비. 이미 죽어버린 사람. “
– 작가노트 중에서
제가 뒤샹의 작품앞에서 거의 두시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제가 놀란 것은 뒤샹의 감각입니다. 매체를 다루는 그 감각.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를 포기한 댓가로 얻은 매체에 대한 자유입니다. 덕분에 저도 그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고요…

Written by jinopark

November 20, 2009 at 11:2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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