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1.1

Jino PARK's arts work note

Archive for September 2009

200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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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jinopark

September 28, 2009 at 5:3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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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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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jinopark

September 27, 2009 at 2:4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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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ma 200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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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jinopark

September 20, 2009 at 1:1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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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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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명성황후”는 초상사진작업이다. 부재하는 이의 존재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이 작업의 핵심이다.

어찌보면 사진작업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명성황후라는 소재에 매달려 10년 넘게 고심하고 있는 까닭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40여 년 전 까까머리 초등학교시절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처음 접하며 느꼈던 허망함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그 허망함은 100년 전 우리 조상은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기에 나라의 어머니인 국모의 처참한 죽음까지 보아야 했던가 하는 허망한 의문이기도 하고, 그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 앞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예, 지, 신 따위의 조상님의 점잖은 가르침이 부질없다고 느껴지는 허망한 충격이기도 했다.
그 충격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서 사라지지 않았거니와 이것은 크게 보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이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에게는 다른 나라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까? 나는 그것이 역사관에 달린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바른 역사관은 내 나라에 긍지를 갖게 한다. 역사적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한다.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한 개인, 한 가족, 한 가문, 한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반대로 자존심을 잃어버린 나라는 아무리 경제를 발전시키고, 예술을 중흥하고, 스포츠를 장려해도 국가적 콤플렉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끝내 국가적 우울증에 빠져 마냥 슬픈 개인들이 사는 나라가 된다. 나는 우리나라가 국가적 우울증에 걸려있다고 생각한다. 산업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도 국가적 우울증 때문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에도 모두가 불안해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며, 비눗방울같이 얄팍하고 가벼운 말초적 쾌감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도 모두 국가적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른 역사관은 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바른 사람을 키우는 초석이 된다. 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제 나라 역사에 긍지를 가지고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당당하고 깊게 이해하게 된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것에 금이 가고 어긋난 지점을 찾아 바로 잡아야 할 것인데 나는 그 균열의 시작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생각한다. 명성황후를 시작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인물들과 사건들의 위치와 의미를 다시 바로 잡아야 바른 역사관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업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중요한 과제라고 믿는다.

‘궁:명성황후’ 는 10년 전 어느 날 고궁에서 본 푸른빛을 따라가는 작업이다.
그날 나는 인적 드문 고궁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바라보던 나뭇가지에 살얼음에 금가듯 붉은 빛이 스며들며 하늘이며 땅이 온통 푸르게 물들던 모습을 보았다.
그 푸른색은, 고려청자의 그 푸른색, 추석하늘의 그 파란색, 조선여인의 머리에 꽂은 옥비녀, 어린아이 팔목에 돋은 정맥같이 파란 소스라치도록 푸른 비취빛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황후와 같이 성장을 한 어떤 여인의 실루엣이었다.
그때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것은 나를 크게 소리쳐 불렀고, 나는 매번 그 소리에 이끌려 그 궁앞에 가 섰다. 그리고 항상 그 붉은 빛과 푸른빛을 봤다.
고고하고 우아한 황후의 전쟁과 같은 붉은 빛과 푸른빛의 대비. 나는 그것을 재현하려 노력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이것은 안다.
이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전쟁기록화이고, 명성황후는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전사한 것이며, 그녀는 아직도 여기 서서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

Written by jinopark

September 13, 2009 at 3:1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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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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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or not to be.

과연 햄릿의 고민이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저울의 무게는 죽음쪽으로 기울었던 것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에 상당하는 무게를 짊어지고 저울의 반대쪽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 그러니 그의 질문은 삶에 치러야 할 고통과 시련등의 댓가가 과연 값어치 있는 것이냐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닐까? 더욱이 그 삶이라는 것도 끝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매우 유보적인 삶이라면…
햄릿의 고민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사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지 않았을까?
이미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햄릿은 강하다. 그는 죽음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탁 끈을 놓아버리듯이 죽어버릴 수 있다. 누군가 지금 죽여준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따라서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야 다른 의문도 풀린다. 유약한 햄릿에 대한 의문. 복수의 광기에 사로잡혀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한 유약한 젊은이가 이끌어가는 복수극이 그렇게도 잔혹하다는 것이 나는 항상 의아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사실은 죽음도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발 한발 적에게 다가가 목을 움켜쥐는 생사를 초월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라면 수긍이 간다.
그러니까 햄릿은 좀비. 이미 죽어버린 사람.

Written by jinopark

September 7, 2009 at 3:5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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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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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coined in the writings ofMarshall McLuhan,metamedia referred to new relationships between form and content in the development of newtechnologies and newmedia. [1]

Written by jinopark

September 5, 2009 at 12:2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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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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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틀을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에 관한 것이다. 환상이란, 실재감이란, 그 만들고자 하는 것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떤 틀을 선택했고, 그것에 관객이 얼마나 쉽게 링크되는가에 관한 문제다.

방금 사람을 찔러죽인 살인자의 칼을 재현한 여러가지 매체를 생각해보자. 그것이 사진일수도, 그림일수도, 비디오일수도, 심지어 실물 그 자체일수도 있지만, 그것에 관객이 정서적 충격을 느끼거나, 그것에 실감하는 것은, 매체가 가지고 있는 시각적 표현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오히려 개별 매체의 표현력은 관객이 그것을 실감나게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테면 만화의 경우에 살인자의 칼은 그것이 극화체로 묘사가 되었건, 명랑만화체건 독자가 그 만화에 얼마나 빠져들었는가가 관건이다. 일단 독자가 만화라는 틀에 빠져들고 난 다음에는 단순한 삼각형과 검은 점 몇개 만으로 표현된 그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칼날의 날카로움이 피부로 느껴질 것이다.
각각의 매체는 저 마다의 틀이 있고, 그 틀에 관객이 얼마나 쉽고 깊게 동화되는 가에 따라 생생함의 정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내 문제는 틀을 대체할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찾고 나면,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Written by jinopark

September 5, 2009 at 3:5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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